달러 강세에 원화값이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다. 레고랜드 사태 이후 17개월만에 1400원을 위협한 환율은 당국의 구두개입에 겨우 1390원대로 내려왔다. 다만, 안심하긴 이르다. 전문가들은 중동 지정학적 이슈가 불거질 경우 일시적으로 최대 1450원대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한다.
17일 서울외환시장에 따르면 전날 원·달러 환율은 전거래일 대비 10.5원 오른 1394.5원에 거래를 마쳤다. 종가 기준으로는 연중 최고치로 레고사태 당시인 2022년 11월 7일 기록한 1401.2원 이후 가장 높다.
그나마도 오전 중 1400.0원까지 오르자 외환당국이 구두개입에 나선 후에야 낙폭이 줄어들며 1390원대에서 멈출 수 있었다. 1400원대 환율은 1997~1998년 외환 위기(IMF사태)와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2년 하반기 레고랜드 사태 등 주요 이벤트 발생 시기를 제외하면 가장 높다.
가장 큰 원인은 미국 달러화 자체 강세다. 주요 6개국 통화대비 달러의 상대적 가치를 의미하는 달러인덱스는 106선에 올라와 있다. 지난해 11월 이후 5개월 만에 최고 수준이다.
미국의 금리 인하 기대가 밀린데다 중동 지정학적 불안에 안전자산 선호가 짙어진 이유가 크다. 예상보다 높은 소비자물가지수 상승에 최근에는 견조한 미국의 경기 상황도 금리 인하 필요성을 낮추고 있다. 미국의 3월 소매판매는 0.7% 증가해 전망치 0.3%를 크게 웃돌았다.
이 결과 연준의 금리 인화 횟수 전망은 기존 3회에서 최근에는 1~2회로 낮아졌다. 첫 금리 시기 전망도 후퇴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 페드워치에 따르면 7월 인하 기대는 한달 전 70%대 후반에서 최근 48%로 절반 이하로 떨어진 상황이다.
중동 전면전 위기도 달러 강세를 유발하고 있다. 전쟁 등 국제 정세 불확실성은 안전자산인 달러 수요를 높이는데 다 유가 오름세까지 겹쳤다. 유가 상승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금리 인하 기대를 후퇴시킨다. 최근 브렌트유는 90달러대까지 올랐지만 시장에서는 확전시 최대 130달러까지 뛸 것으로 예상한다.
여기에 엔화 약세와 우리나라 증시 부진도 원화값을 끌어내리고 있다. 전날엔·달러는 장중 154엔을 돌파해 34년 만에 최저치로 추락했다. 최근 달러 강세에 엔화와 원화는 동조화 현상이 짙어지고 있다. 코스피와 코스닥은 각각 3거래일과 2거래일째 하락세다.
시장에서는 환율이 일시적으로 최대 1450원대까지 치솟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는다. 속속 발표되는 미국의 양호한 경제 지표와 중동 불안 고조가 달러 가치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다만 당국의 개입 경계감에 1420~1430원대까지 상승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박수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금리 상승과 연준 인하 기대 조정으로 외환시장 변동성이 확대된 상황”이라며 “전고점은 1450원 내외지만, 외환시장 변동성 확대에 따른 중앙은행의 환시개입 가능성을 고려해 2분기 원·달러 상단을 1420원으로 제시한다”고 말했다.
최광혁 이베스트증권 연구원은 “연준의 금리 인하 후퇴에 지정학적 리스크가 원화 약세에 크게 작용했다”고 봤다. 이어 “중동 정세에 따라 유가가 100불 가까이 갈 경우 단기적으로 1430원 터치 가능성도 열어 놓는다”며 향후 이스라엘의 행보를 변수로 지목했다.
다만 최근 원 가치 폭이 다른 주요국보다 유독 크다는 점에서 원·달러 상승이 일시적일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외신에 따르면 지난달 29일과 비교해 이달 12일 기준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2.04% 떨어진 반면, 전쟁 중인 러시아나 이스라엘 등은 각각 1.69%, 1.54%만 하락했다.
문정희 국민은행 연구원은 “현재 환율은 펀더멘털보다 미국의 금리 인하 지연과 중동 분쟁에 대한 시장의 불안 심리로 위험 회피가 크다는 판단”이라며 “단기적으로는 2022년 10월 기록한 1420~1450원까지 뛸 수 있지만 불안 심리가 잦아들면 다시 1350원대로 갈 수 있다”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