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아카데미는 변화를 택했다. 올해 아카데미를 관통한 키워드는 ‘이민자’였다.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The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AMPAS)는 12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국에서 세탁소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중국계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이하 ‘에브리씽’)에 오스카 7개를 안겼다. ‘에브리씽’이 탄 상은 작품·감독·각본·편집·여우주연·여우조연·남우조연 등 모두 주요 부문이었다.
‘에브리씽’은 앞서 10개 부문에서 11개 후보를 올리며 돌풍을 예고했다. 일부 부문은 수상이 확실시 되기도 했다. 다만 경합이 예상됐던 쪽에서도 주류 영화·배우·감독들을 밀어내고 오스카를 거머쥐며 역사를 완성했다. 일례로 감독 부문에서 ‘에브리씽’의 대니얼스 감독과 경쟁한 건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연출가인 스티븐 스필버그(‘더 파벨만스’)였다. 여우주연 부문에서 양쯔충과 맞붙은 케이트 블란쳇(‘TAR 타르’)은 할리우드 대표 연기파 백인 배우다. 이렇듯 ‘에브리씽’은 할리우드 주류를 제치고 올해 아카데미의 주인공이 됐다. 이 영화 프로듀서인 조너선 왕, 대니얼스의 한 축인 대니얼 콴, 남우조연상 수상자인 키 호이 콴 등 이 영화에 참여한 많은 배우와 스태프가 이민자이거나 이민자 2세이다. 여우주연상을 받은 양쯔충은 아예 말레이시아 국적 배우다.
아카데미는 새로운 역사를 쓰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양쯔충은 아시아 배우 최초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품에 안았다. 이 부문 유색 인종 수상자는 2002년 할리 베리(‘몬스터 볼’) 이후 두 번째이기도 했다. 키 호이 콴 역시 역대 두 번째 아시아계 남우조연상 수상자가 됐다. 콴 이전 수상자는 1985년 ‘킬링 필드’로 수상한 캄보디아계 미국인 배우 항 솜낭 응오였다. 두 번째 수상자가 나오기까지 38년이 걸린 셈이다. 아시아계 배우 두 명이 동시에 오스카 연기상을 받은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었다.
양자경 여우 주연상…아시아 배우 최초 ‘역사’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을 향한 아카데미의 전진은 2010년대부터 감지됐다. 2010년 캐스린 비글로우 감독이 ‘허트 로커’로 여성 감독 최초 작품상 기록을 썼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4년엔 스티브 매퀸 감독이 흑인 노예의 삶을 그린 ‘노예 12년’으로 흑인 최초로 작품상을 받은 감독이 됐고, 이듬해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이 작품상을 받아 영미권 감독이 아닌 감독의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첫 번째 사례가 됐다. 2017년 ‘문라이트’는 흑인 감독이 만든 흑인 성소수자에 관한 영화였고, 2018년 ‘셰이프 오브 워터’는 멕시코 감독이 만든, 장애를 가진 여성이 괴물과 사랑에 빠지는 영화였다. 그리고 2020년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영어가 아닌 언어로 만들어진 영화 최초로, 그리고 아시아 국적을 가진 감독 최초로 작품상을 받았다. 2021년엔 중국 여성 감독 클로이 자오가 만든 ‘노매드랜드’가, 2022년엔 청각장애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스트리밍 영화 ‘코다'(애플TV+)가 작품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올해 아카데미는 이민자들이 모여 만든 이민자에 관한 영화를 선택했다.
베트남계 키호이 콴 남우조연상…40년 버틴 영광
‘에브리씽’의 수상자들은 무대에 올라 자신이 이민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조너선 왕은 이민자 아버지가 했던 말을 언급하며 이번 영화를 함께 만든 이들에게 공을 돌렸고, 대니얼 콴 감독은 이민자 부모를 이야기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또 키 호이 콴은 “7살 때 보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얘기로 소감을 시작했다.
[95회 아카데미]’에브리씽’ 7관왕..모든 걸 가졌다…’서부전선’ 4관왕
실제로 ‘에브리씽’은 최근 아카데미가 견지해온 다양성 인정과 소수자 포용을 통한 편견과 관습 타파에 정합(整合)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영화는 앞서 언급한대로 중국계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담았으며, 중국어와 영어가 반반씩 섞여 있고, 말레이시아 배우가 주연을 맡은데다가 백인 배우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감독을 비롯한 다수의 스태프가 중국계 이민자이다. 또 할리우드 정통 문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기보다는 B급 정서와 유머를 기반으로 삼은 비주류 영화이다. 물론 ‘에브리씽’이 미국에서 만들어진 미국 영화인 것은 맞지만, 이같은 국적성을 떼고 봤을 때 미국 영화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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