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캘리포니아 전역을 휩쓴 산불이 수천 가구의 삶을 파괴한 가운데, 보험사들의 행태를 놓고 대형 소송전이 벌어지고 있다. LA 타임스는 이번 사건이 단순한 재난 피해를 넘어, 캘리포니아 주택 보험 체계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핵심은 이른바 ‘최후의 보험’인 FAIR 플랜의 급속한 확대다. 이 플랜은 원래 민간 보험사로부터 보험을 받지 못한 고위험 지역 주민을 위한 안전망이지만, 최근 퍼시픽 팰리세이즈, 말리부, 알타데나 등 산불 위험 지역에서 일반 보험 계약이 무더기 해지되며 FAIR 플랜 가입자가 폭증하고 있다.
하지만 FAIR 플랜은 보장 범위가 제한적임에도 보험료는 더 비싸, 사실상 ‘비싸고 불충분한 보험’이 되어버렸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에 분노한 일부 주택 소유자들은 지난달 LA카운티 고등법원에 스테이트팜, 파머스, 머큐리 등 200여 개 보험사를 상대로 두 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보험사들이 고의적으로 기존 보험 계약을 해지하고 FAIR 플랜으로의 전환을 유도해, 보험료 수익은 늘리고 재난 손실 부담은 줄이려 했다고 주장한다. 소송에서는 이러한 조치로 인해 보험사들이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이익을 챙겼다고 지적했다.
담합과 보이콧 의혹
두 건의 소송 중 첫 번째는 소비자 집단소송으로, 부당하게 높은 보험료를 지불한 이들에게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두 번째는 산불 피해 보상 소송으로, FAIR 플랜의 불충분한 보장으로 이중 피해를 본 피해자들이 대상이다. 두 소송 모두 손해액의 3배 배상을 요구한다.
소송 측은 보험사들의 이러한 집단적 행위가 FAIR 플랜 운영위원회 회의, 캘리포니아 개인보험연맹, 미국재산손해보험협회(APCIA) 등에서 이루어진 **‘암묵적 담합’**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현재까지 회의록 등 명시적 증거는 확보되지 않았다.
특히 소송은 2024년 주 보험국 커미셔너 리카르도 라라가 승인한, FAIR 플랜 적자 발생 시 보험사 자체 고객에게 추가 요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한 정책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 조치는 산불 이후 처음으로 발동됐다.

보험사들 “반독점법 위반 아냐”
이에 대해 APCIA 측은 “정부에 업계 입장을 전달할 권리가 있으며, 반독점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법률 전문가들은 이 사안의 핵심인 담합 여부 입증이 매우 어려운 과제라고 지적한다. 반독점 전문 변호사 도널드 페퍼먼은 “각 보험사가 자발적으로 경제적 판단에 따라 철수했다고 주장하면 이를 반박하기 어렵다”며 “위험도가 낮은 지역에 집중하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다”고 말했다.
펜실베이니아대학의 보험법 교수 톰 베이커 역시 “보험사들이 통계에 기반해 합리적 대응을 했다고 주장하면, 반박하려면 그것이 ‘상식적인 선을 넘었다’는 극단적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버지니아대학의 제임스 노튼 교수는 “보험사들이 유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동일한 전략을 택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이른바 ‘소프트 담합’으로 불리는 현상으로, 명시적 공모 없이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해 유사한 행동을 취하는 구조다.
“직접 증거 없어도 입증 가능”
원고 측 변호사 마이클 비다트는 “우리가 직접적인 ‘담합하자’는 이메일을 기대하는 게 아니다”라며, 간접적 증거의 축적을 통해 담합 구조를 입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확보한 조사 결과만으로도 입증의 토대는 충분하며, 이후 드러날 증거는 보너스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소송은 캘리포니아 보험 산업 전체의 구조적 투명성과 공정성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원고 측이 명확한 증거를 확보할 경우, FAIR 플랜을 포함한 보험 구조 전반에 대한 개편 요구로 확산될 수 있다.
<박성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