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前) 주(駐)인도 미국대사였던 막스 오필스가 LA에 사는 딸의 아파트를 방문하던 중 자신이 고용한 운전사에 의해 피살된다. ‘광대 살리마르’라는 베일에 쌓인 운전사. 얼핏 테러리즘으로 보이는 이 사건의 이면에는 깊은 그의 개인적인 원한이 숨어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카슈미르의 계곡 마을에서 줄타기의 달인 광대였던 살리마르는 미녀 무희인 부미와 사랑에 빠진다. 부미는 힌두교, 그는 무슬림이었다. 그러자 두 집안은 그 둘을 위해 종교적 갈등과 불화를 접고 손을 잡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프랑스 출신 유대계 미국 대사 막스가 전통공연을 보기 위해 이 마을을 방문하면서다. 그는 부미를 보자 욕정에 눈이 멀고, 마침 부미는 시골 마을과 광대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던 차 그의 첩이 되어 샬리마르를 버리고 떠난다. 하지만 그녀는 막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할 뿐이었다.
이후 아내가 있던 막스는 ‘순진한 소녀를 착취한 미국인’으로 지탄받으며 명성은 추락하고, 부미는 그에게서 난 딸을 막스의 아내에게 맡긴 뒤 고향으로 돌아와 숨어 산다.
그 무렵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 카슈미르 분쟁이 폭발하고, 이 지역을 장악한 인도군은 자치를 원하는 카슈미르 무슬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이에 분노한 카슈미르 청년들은 해방전선에 가입해 온갖 테러로 대항한다.
절망에 빠진 샬리마르는 사랑을 배반한 부미와 그녀를 취한 막스 그리고 그들의 아이를 죽이기 위해 해방전선에 들어가 테러리스트의 길을 걷고 암살자로 거듭난다. 이슬람 존엄성을 모독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칼에 찔려 오른쪽 눈을 잃은 인도계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의 소설 ‘광대 살리마르’ 이야기다.

한편 막스도 한때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다. 하지만 작가는 레지스탕스 영웅이었던 그의 저항이 과연 조국에 대한 뜨거운 열정 때문만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행동이 강제수용소에서 의학실험의 대상으로 죽은 부모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지역으로 편을 나눈 채 피비린내 나는 보복을 주고받는 테러리즘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그 깊은 내면에 잠재한 아내를 빼앗긴 살리마르나 부모를 잃은 막스의 복수심 같은 감정이 불씨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아무튼 그들의 운명은 지금까지도 갈등이 지속되는 카슈미르의 숙명과도 같다. 사랑이 격렬한 증오로 바뀌어 순수한 광대가 암살자가 되듯, 서로 변해 피해자들끼리 싸우는 모습은 어리석은 오늘의 현실을 닮았다.
카슈미르 주민의 다수는 무슬림이지만 통치자는 힌두교도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적으로 인도나 파키스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카슈미르인을 위한 세상을 원했다. 일찍이 16세기 인도반도에 굴림했던 무굴제국 황제 자항기르는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카슈미르가 바로 그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지상의 낙원이 비극의 지옥으로 운명이 바뀐 건,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분리 독립시킬 때 종교에 따라 힌두교인 인도와 이슬람인 파키스탄으로 분할하면서 두 나라 북부에 접해있는 카슈미르 지역을 어디로 귀속시킬지 결정하지 않고 떠난 무책임의 결과였다.
이후 두 나라는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세 차례 전쟁을 치렀고, 인도령과 파키스탄령으로 나뉜 후에도 지난 80년간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양국의 군비 경쟁은 핵개발로 이어지고, 두 나라는 모두 핵보유국이 됐다.
지난달 22일, 살리마르와 부미가 살던 그 계곡 마을 인근에서 총기 테러가 발생했다. 세계는 남아시아의 ‘화약고’인 이곳에서 또 다시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핵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섬유의 보석’으로도 불리는 고급 양털 캐시미어의 고향인 카슈미르. 지상의 낙원이었다던 카슈미르. 부디 이번 갈등이 ‘4차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