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 차르(황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0년 집권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크렘린궁 대궁전(Grand Kremlin Palace)을 지나 안드레옙스키 왕좌의 홀까지 긴 통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는 익숙한 길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7일 이 레드카펫을 걸어 5번째 취임 선서를 하고 새로운 6년 임기를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황제, 사실상의 ’21세기 차르(Tsar)’ 대관식이었다.
대통령 5번-총리 2번…’21세기 차르’
푸틴 대통령은 소련 붕괴 후 러시아연방이 수립된 뒤 최장 집권 중인 지도자다. 그는 1952년 10월7일생으로, 현재 72세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전신인 KGB 출신이며, 대통령 4번(2000년·2004년·2012년·2018년·2024년)과 총리 2번(1999년·2008년)을 지냈다. 지금까지 집권 기간만 25년째다.
같은 기간 미국은 5명의 대통령, 영국은 7명의 총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는지 가늠케 한다.
푸틴 대통령은 1990년 정계에 입문해 1999년 8월 총리가 됐다. 그해 12월31일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권한대행을 맡다 이듬해 3월26일 대선에서 처음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어 2004년 71%의 높은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헌법상 3연임이 불가능했기에 2008년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대신 대통령 자리에 앉혔고 자신은 ‘총리 2기’를 지내며 사실상 전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대통령 임기가 6년으로 늘어난 2012년(63%)과 2018년(76%) 연이어 재선됐다. 올해 3월 선거에선 역대 최고치인 87%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이에 따라 푸틴 대통령은 올해에 이어 2030년에도 대선 출마가 가능해 최장 2036년, 84세까지 직접 권좌에 앉을 수 있게 됐다. 여기에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의 임기도 리셋된 만큼 그 경우의 수까지 따지면 푸틴 대통령으로선 완벽하게 종신 집권할 수 있는 셈이다.
BBC는 푸틴 대통령의 취임식 레드카펫 길은 익숙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2000년 5월 첫 취임식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짚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겠다”며 “러시아를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지금, 푸틴 대통령은 햇수로 3년째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대신 비판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자신의 권력에 대한 모든 견제와 균형을 제거하고 있다고 BBC는 지적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시절 백악관 유라시아 선임보좌관을 지낸 피오나 힐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푸틴 대통령은 지금 자신을 블라디미르 대제, 러시아 차르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의 첫 두 차례 대통령 임기 때로 돌아간다면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는 러시아를 정치적으로 안정시키고 다시 정상화했다. 러시아 경제와 시스템은 그 어느 때보다 나은 성과를 냈다”면서 “하지만 10년 전 크림반도 합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러한 궤도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푸틴은 실용주의자(pragmatist)가 아닌 제국주의자(imperialist)로 변했다”고 비판했다.
푸틴 대통령의 집권 5기가 지난 7일(현지시각) 시작을 알리면서 한반도와 세계 정세에 끼칠 영향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최소 2030년까지 정권을 연장하면서 러시아와 북한과 결속을 가속해 한반도 신냉전 구도를 고착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푸틴 대통령의 정권 생존이 북한의 체제 생존과 맞물리면서 한반도 긴장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지정학적 환경 덕에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푸틴 뒷배 ‘6년 더’ 늘린 북한
푸틴 대통령의 집권 연장이 북한의 뒷배를 늘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동안 중국에 크게 의존했던 북한이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보장된 러시아에 같은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 러시아를 찾아 푸틴 대통령과 회담한 뒤로 양국 교류는 크게 늘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이 전쟁 중인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고 기술을 이전받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두 권위주의 지도자가 맺은 공생관계 아래 양국은 서로의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차츰 크게 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러시아로 다가가는 북한의 행보는 중국에 긴장감을 조성하는 동시에 강한 결속을 촉구할 수 있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외교 다각화가 용이해진 환경적 조건이 북한에 한반도에서 긴장을 높이고 강한 주장을 펼칠 패를 쥐여줬다는 시각도 있다. 북한으로서는 푸틴 대통령의 정권 연장으로 반사이익을 얻은 셈이다.

푸틴, 북한에 정치적 선물할 수도
압도적인 지지 아래 탄생한 푸틴 대통령의 5기 정권은 북한의 불완전한 체제 생존에 양분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러시아와 밀착이 심화하면서 푸틴 대통령이 북한에 정치적 선물을 건넬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에서 북한 방문을 약속한 바 있다. 지난해 10월 북한을 방문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외교 채널을 통한 일정 조율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방문은 아직 성사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푸틴 대통령은 장기전 양상에서 부각되는 북한의 역할에 화답하기 위해 북한 방문을 서두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향한 호전적 여론에 힘입은 만큼 서방 제재 아래서 돌파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국 군사물자 조달에 크게 이바지하는 북한을 찾아 정치적 선물을 건네 양국 밀착을 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양국의 친선 관계를 강조하면서 협력 강화 메시지를 내거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는 등 북한 체제의 안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가자지구 상황에 힘 받는 푸틴, 가라앉는 바이든
지정학적 환경 덕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득을 취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탈출구 없는 충돌이 장기화하는 상황 덕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미국의 통제력 약화 확인, 해당 지역 안정성 저하, 장기전·확전 가능성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인기를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양대 전쟁으로 인기 하락을 겪는 바이든 행정부가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백악관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내어줄 수도 있다는 관측이 부상하고 있다. 규칙 기반 질서를 내세우던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 행정부로 권력을 이양하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릴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이 공언한 ’24시간 안 종전’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할 방법론은 지원 대신 협상 종용으로 우크라이나를 몰아넣는 방식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으로부터 지원 단절을 넘어 국제적 압박을 받게 되면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 개연성이 크다는 견해가 주류다.
푸틴 5.0 시대는 2개의 전쟁, 미국 대선, 북핵이라는 변수로 짜인 고차방정식으로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 방정식에서 푸틴 대통령은 북한-중국-러시아 3국 협력을 강화하고 양대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 점령한 채 해법을 찾아갈 것이 유력해 보인다. ‘스트롱맨’ 푸틴 대통령은 앞으로 6년 동안 권위주의적 통치와 장기 집권 프리미엄을 최대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