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재벌, 도미니크 독재자 보좌관 등 신탁회사 설립
이 회사가 조세피난처 버진아일랜드 회사 소유하는 식
사우스다코타도 유사…”미국이 불법자금세탁 허브 됐다”
미국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낮은 와이오밍주가 러시아 재벌, 독재자의 보좌관, 음식료업계 거물 등이 자산을 도피시키는 조세피난처가 됐음이 판도라 페이퍼를 통해 밝혀졌다고 미 워싱턴포스트(WP)가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와이오밍주 잭슨시 마을 광장에는 그랜드 테톤 앰버 에일(Grand Teton Amber Ale)과 옐로우스톤 레모네이드(Yeoolwstone Lemonade)를 판매하는 싸구려 술집의 네온 불빛이 번쩍인다. 카우보이 커피(Cowboy Coffee)에선 들소고기 칠리를 팔고 파이브 앤드 다임 제네럴 스토어(Five & Dime General Store)에선 카우보이 모자와 총알로 만든 기념품을 판다.
엘크사스뿔 장식으로 널리 알려진 서부의 한 마을에선 변호사와 부동산개발업자들도 보다 특별한 특산품을 팔고 있다.
“카우보이 칵테일”이라는 이름의 자산관리 상품이 최근 몇 년 새 미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지역에 새로운 이방인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여러 형태로 변형된 이 칵테일은 와이오밍 신탁과 소유주가 밝혀지지 않은 민간기업들로 구성되며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돈을 투자해 사용하는 특별히 비밀스런 자산이다.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프라이버시 보호법과 주당국의 겉핥기식 감독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백만장자, 억만장자들이 이곳을 주목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인도와 이탈리아, 베네수엘라 가문이 국제 금융센터를 떠나 와이오밍주의 스키 리조트와 광산마을에 있는 법률회사들을 찾고 있다. 덕분에 와이오밍은 세계 최고의 조세피난처가 됐다.

판도라 페이퍼를 통해 와이오밍 신탁을 설립한 10여명의 국제 고객들이 밝혀졌다.
그중 한 사람이 러시아 억만장자 이고르 마카로프다. 그는 2017년 법에 의해 미 재무부가 러시아 정부와 가까운 재벌 및 정치인으로 지정했다. 마카로프의 회사는 러시아 국영 가스거대기업과 불법거래 의혹 및 미국 의원의 딸이 관련된 영향력 행사 의혹으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아르헨티나 바기오 가문 여자 두목의 주류회사는 지역 당국에 의해 산업폐기물 불법 처분으로 기소됐고 아들이 불법 자금 세탁혐의에 휘말려 있다. 이들도 재산 관리를 와이오밍에서 하고 있다.
도미니크 공화국의 카릴 하체 말쿤도 있다. 폴로 선수 겸 육군 장교인 그는 정적 살해를 명령하고 수많은 아이티 사람들을 숨지게 만든 악명높은 독재라 라파엘 트루히요의 불법 자산을 관리하고 있다.
자금세탁을 추적하는 전문가들과 법집행기관들이 몇년 동안 연방 및 주 의원들에게 의심스러운 돈이 세무당국과 채권자, 범죄수사기관의 눈을 피해서 미국 조세피난처에 유입되고 있다고 경고해왔다. 그러나 와이오밍에서는 주의원들의 지원을 받으며 전세계 잠재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상품이 판매되고 있다.
이들 금융상품은 각종 신탁이 핵심 역할을 한다. 돈과 재산을 맡김으로써 채권자의 추심을 피할 수 있고 세금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신탁 소유자들은 독립 관리인을 지명해야 한다. 보통 친척이나 친구, 금융자문가들로 이들이 투자와 지출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한다.
와이오밍은 가족소유 사기업을 트러스트에 기탁하는 것을 허용한다. 미국에 이런 주는 몇 곳 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자산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과 금융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일부 회사들은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으며 정기 검사와 기타 주 기관의 감독도 받지 않는다. 또 신탁 내부에 부동산이나 은행 계좌같은 자산을 보유할 수 있는 회사를 설립하는 식으로 몇 겹으로 재산을 감출 수도 있다.
카우보이 칵테일이라는 이름의 이런 방식을 통해 부자들이 전세계 몇 곳 안되는 조세피난처와 동등한 정도로 미국으로 돈을 보내 투자하고 소비할 수 있다.
리치먼드대학교 법학과 앨리스 테이트 교수는 “와이오밍이 국내외의 금융센터가 되고 있다. 선물 상자 속에 선물 상자가 또 있는 모양이다. 더 많이 포장할수록 세금탈루나 금융범죄가 있는지 알기 어렵게 된다”고 말했다.
전세계 금융 허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와이오밍은 큰 혜택을 보고 있다. 이곳에서 1만4000㎞ 떨어진 싱가포르의 한 신탁회사 홈페이지에 와이오밍이 고객의 이름과 자산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조세피난처로 추천되고 있다.
주당국에 따르면 와이오밍의 신탁회사들이 관리하는 자산은 현재 315억달러(약 37조 5480억원)에 달한다.
와이오밍 주의원들은 금융산업이 석탄, 석유 등 자연자원에 대한 세금으로 버텨 온 와이오밍주에 일자리를 비롯한 경제적 혜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번키 루크 공화당 주의원은 “기업친화적이어야 하는 건 기본”이라며 “우리가 남들보다 앞서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수가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공화당이 장악한 주의회는 종종 신탁을 설립하는 회사들에 최소한의 세금이라도 부과해야 한다는 요구를 거부해왔다.
1977년 와이오밍 주의회와 일부 회계사들이 다른 주의 석유회사가 유한책임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승인했다. 지금은 이 방식이 채권자로부터 소유자의 신분을 감추는데 전국적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석유회사들은 알래스카에서 같은 방식을 시도했으나 두차례 거부된 뒤 화석연료 산업 의존도가 큰 와이오밍을 찾았다.
이후 30여년에 걸쳐 주의원들이 법안을 지속적으로 개정해옴으로써 회사 소유주가 신분을 감출 수 있도록 했다. 산업관계자와 변호사, 의회 자문가들은 이 과정을 “와이오밍 가정 요리(Wyoming home cookong)”라고 부른다. 주의회는 또 지난 2011년까지 신탁회사법을 100여차례 개정해 ‘카우보이 칵테일’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조지아주 한 부동산업자는 홈페이지에 ‘카우보이 칵테일’을 “술집에서 파는 칵테일이 아니라 얇게 잘라서 파는 빵 이후에 최고 상품인 자산보호를 위한 이중적 접근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난해 예루살렘 헤브류대학 애덤 호프리-위노그라도우 법학교수 연구에서 와이오밍은 전세계 10대 최소 규제, 고객 친화적 신탁 감독지역으로 꼽혔다. 미국내에서는 사우스다코타주보다 앞서는 조세피난처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월 유럽의회에서는 와이오밍, 사우스다코타, 알래스카, 델라웨어, 네바다를 “금융 및 기업 비밀” 허브로 지목했었다.
오바마 정부와 트럼프 정부시절 국가안전보장위원회 소속으로 일한 조시 루돌프는 “언제부턴가 미국이 국제 자금세탁 단속에서 구멍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의회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판도라 보고서는 종합적이지는 않지만 와이오밍에서 2016년~2019년 사이에 이뤄진 자금 거래와 관련 고객 자료를 밝히고 있다. 유럽과 카리브해 지역의 조세피난처에서 회사를 옮겨온 사람들도 있다.
러시아 재벌 마카로프는 2016년말 와이오밍에 규제를 받는 와이오밍 신탁회사와 이 회사를 관리하는 규제를 받지 않는 신탁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 안에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설립된 비밀 회사 세 곳을 포함시켰다. 이 중 한 회사가 13석 짜리 제트비행기를 소유하고 있다.
마카로브와 그의 석유 및 가스회사인 이테라는 유럽과 미국의 감시를 받고 있다. 2000년대 초 이 회사가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인 가즈프롬으로부터 부적절한 지급보증을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으며 직후에 미 무역 및 개발위원회가 이테라에 대한 86만8000달러의 지급을 정지했었다.
2006년에 미 연방수사국(FBI)는 이테라사의 플로리다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미국 의원에게 영향을 미치려한 혐의에 대한 수사의 일환이었다. 그밖에도 마카로프는 여러 혐의로 조사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 마카로프가 와이오밍에 신탁을 설립한 것이다.
아르헨티나 바기오 가문의 여든 세살 여두목 셀리아 마리아 아구에다 무니야도 2018년 와이오밍에 비규제 신탁을 설립했다. 이 신탁회사가 마이애미 은행에 700만 달러 계좌를 가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
아이티 주민 수십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악명높은 트루히요의 자산관리인 하체가 사망하기 전 와이오밍에 설립한 신탁회사도 있다. 이 회사도 마이애미은행에 계좌를 가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회사를 자회사로 두고 있다. 하체와 그의 부인은 지난해 코로나에 걸려 사망했다.